건재 김천일의 학문과 의병활동
- Author(s)
- 김정우
- Issued Date
- 2009
- Abstract
- 明宗代 외척 尹元衡과 李樑이 국정을 농락하고 사림을 탄압하자, 일군의 학자들은 향리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미래를 준비하였다. 곧 학풍과 공부하는 방법에 따라 학파가 형성되었으며 호남에서도 金麟厚ㆍ盧守愼ㆍ李恒 사이에 학문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며 학문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 김천일은 이항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이항의 소개로 김인후와 노수신을 역방하고 학문을 익혔다. 김천일은 노수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음을 虛靈知覺의 본체로 생각하고 理와 氣를 지각하는 것이 人心ㆍ道心이라는 주희의 人心道心說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이항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는 유일로 천거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에도 朴淳을 비롯하여 成渾ㆍ鄭澈ㆍ高敬命 등 주로 西人계 인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김천일은 당시 화담계열을 대표하는 학자인 鄭介淸과도 禮論을 둘러싸고 갈등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온건한 자세를 가지고 옥사가 조속하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성혼․정철 등에게 편지를 보내 간청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그는 나주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北上할 수 있었다. 그의 의병활동은 강화도에 주둔한 시기와 제 2차 진주성 전투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김천일은 강화도에 유둔하면서 난민 구휼과 왕릉 보호 문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공을 세웠다. 그가 강화도에 주둔함으로써 충청ㆍ전라ㆍ평안ㆍ황해 4도가 통할 수 있게 되어 국가의 맥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진주성을 지킴으로써 호남을 보전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제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에는 空城策이 대세를 이룬 가운데 김천일은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며 守城策을 주장한다. 실제 일본군은 성이 함락되자 전라도 일대에 진출하였으며 조선군의 분산 방어 계획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천일의 수성 전략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패전과 관련하여 柳成龍과 安邦俊 사이에 김천일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유성룡은 『懲毖錄』에서 진주성 함락은 김천일의 실책으로 인한 것이라고 평가한 반면 안방준은 『晉州敍事』에서 김천일 등의 죽음으로 호남이 지켜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이항 계열의 학자들은 학문적으로 비슷한 서인 계열에 흡수되었으며 김천일 또한 당론에서도 서인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유성룡과 안방준이 속한 당파의 입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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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mbargo2010-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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